영화 리뷰

[넷플릭스 드라마 추천] '서른, 아홉' 감상 후기 - 친애하는 너와 나를 위해

쫄쫄랄라 2022. 4. 5. 23:54

 

 

 

(밑에서부터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분들은 스킵하세요!)


1. 친애(親愛). 친밀하고 소중한 너니까

 

차미조, 정찬영, 장주희. 그녀들은 대한민국의 여느 친구들과 다르지 않게 함께 늙어가는 사이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서로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들은 찬영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고나서야 알게 됐다. 췌장암4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찬영은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시한부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부자집에 입양되어 자라나 피부과 의사가 된 미조, 암에 걸린 엄마를 간호하느라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백화점 샵에서 일하고 있는 주희. 그리고 배우가 되려다 사고로 그 길이 뒤틀려 연기 레슨으로 생을 이어가던 불륜녀, 찬영. 다소 억울하고 정당한(?) 불륜이었지만, 이마저도 끊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할 때 하필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드라마는 초반에 찬영의 장례식을 보여주면서 해피엔딩 따위는 없음을 친절히 알려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드라마 중간중간 미조, 찬양, 주희의 10대, 20대, 30대를 더듬어가면서- 함께 추억하면서- 또 그녀의 남자들과의 인연을 곁들임으로 추가하면서 이야기는 절정을 향하는데 그 과정이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할만 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한국 드라마의 진부한 소재인 불륜, 시한부를 전형적이지 않게 다룬 점은 좋았다. 이 모든 것들은 '친애'하는 사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이야기하는 재료로 쓰였다.

 

병의 증세가 심해져 많이 수척해진 찬영과 미조가 병원 복도에서 서로 기대어 함께 슬퍼하던 모습. 찬영이 세상을 떠난 뒤 힘들어하는 미조에게 전달된 찬영의 영상편지. 그들은 서로 친애하는 사이였다. 친밀하고 소중한. 굉장히 진부한 것 같은데도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그러한 우정, 사랑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내게 남아있던 것일까. 그렇게 외롭고 처연한 모습의 그들이 오히려 부러웠으니.

 

 

2. '부고(訃告) 리스트'를 '브런치 리스트'로 바꿔준 우정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브런치 장면이었다.

(1분 20초부터 보면 됨)

평소 생각해왔던 장례식이 아름다운 비주얼로 그려져서 마음에 많이 남은 장면이다. 찬영이 자신의 장례식에 올 지인들을 추려 명단을 미조에게 건넸다. 미조는 주희와 함께 찬영 몰래 부고 명단에 적혀 있는 연락처에 전화를 건다. 찬영이 세상을 떠난 뒤 찾아오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살아 있을 때 만나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장례식은 브런치 파티로 변한다. 지난 인연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미조의 재치와 배려로 찬영은 죽음을 덜 외롭게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정리하고, 감사하며 마칠 수 있게 됐다. 동화처럼 아름다워서, 비현실적이어서 좋았다.

 

 

3. 죽음 앞에서 : "충분한 삶이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죽음이 찾아왔을 때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일 거다. 몸은 암성 통증으로 괴롭지만, 마음은 충만한 찬영. 배우의 삶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지고 말았지만, 사랑하는 연인과의 삶도 포기해야 했지만, 죽음 앞에서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눈물흘렸지만 그녀는 충만한 마음으로 삶을 마칠 수 있었으니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 

책을 읽든, 드라마를 보든 요즘의 내가 무얼 생각하는지에 따라 같은 작품이어도 몰입하는 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요즘의 내가 생각하는 건 죽음이어서 이 드라마에 좋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 같다. 입양도 진행 중인데 입양아의 아픔, 결핍을 비록 피상적이긴 하지만 더 이해하게 되어 좋았다. 드라마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는데 안소희 님의 연기는 많이 아쉬웠다. 앞으로 더 발전한 모습 보여주길 바라며 응원한다.

 

 

4. 재미 없는 삶, 파란만장한 삶, 순탄한 듯 아픈 삶. 모두 인생이다.

 

주희의 삶은 살아있지만 재미가 없는-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보람과 성취가 없는 대부분의 인생을 대표하는 것 같다. 찬영과 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편인데 사실 임팩트가 없어서 그렇지 가장 평범한 서른 아홉을 보여준 것 아닌가 싶다.

찬영의 경우는 좀 파란만장한데 육체 관계가 없는 불륜 생활, 배우로서 늘 불완전연소일 수밖에 없는 주변인의 삶, 갑자기 찾아온 죽음. 이런 재료들은 드라마니까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 같다. 억울함 속에서 원망하고 저주하며 마칠 수 있는 인생을 담담하게 마무리하는 그녀는 진정한 멘탈강자.

미조는 부잣집 딸에 피부과 원장으로 가장 잘 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으나 입양아로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을 감추며 사람들 속에서,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소중했던 소울메이트를 잃어버린 그녀의 삶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가족과 연인에게 사랑받고 물질도 부족한 게 없어 순탄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저마다 다른 모습이지만 모두 인생이며, 각자의 생은 씨실과 날실로 연결되어 그림을 그려낸다. 그것을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모아서 보기에 나름의 긍정과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 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로 살아가는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고 외롭다. 그래서 드라마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있다.

 

오늘. 더 늦기 전에 '친애'하는 누군가와 티타임을 가져보시라.

우리는 서로에게 생각보다 더 친밀하고 소중할 수 있으니.